통계학자 두 사람이 'upon'이라는 단어가 몇 번 나오는지 세어서, 이름 모를 글쓴이의 정체를 밝혀낸 적이 있어요.
그 글쓴이는 제임스 매디슨, 때는 1964년이었어요. 프레더릭 모스텔러와 데이비드 월리스가 넘겨받은 건 『페더럴리스트 페이퍼』 가운데 열두 편이었어요. 매디슨이 썼는지 해밀턴이 썼는지를 두고 역사학자들이 한 세기 반 동안 다퉈 온 글이었죠. 두 사람은 그 논쟁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어요. 주제도, 정치색도, 글에 묻어나는 감정도, 국어 선생님이 눈여겨볼 만한 어휘도 전부 제쳐 뒀어요. 대신 작은 단어를 셌어요. 'upon', 'while', 'by', 'to'. 영어 문장 사이사이에 박힌 조그만 경첩 같은 말이라, 아무도 일부러 고르지 않는 단어예요. 알고 보니 매디슨은 이런 단어를 놀랄 만큼 일정한 비율로 썼고, 그 비율이 해밀턴과는 확연히 달랐어요. 그래서 판정이 틀렸을 확률은 열두 편 중 근거가 가장 약한 편에서도 수십분의 일이었고, 나머지 편에서는 수천분의 일이거나 그보다도 낮았어요. 필명 '푸블리우스'의 주인은 매디슨이었어요. 작은 단어들이 그를 고자질한 셈이죠.
사실 누가 썼는지 맞히는 건 곁가지예요. 낯선 사람이 내 편지를 읽을 때 실제로 만나는 나는 이름도, 얼굴도, 직업도, 어쩌다 꺼낸 화제도 아니에요. '은/는'과 '이/가'를 골라 쓰는 손버릇이에요. '그냥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라고 쓰느냐,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라고 쓰느냐예요. 문장의 길이, 쉼표와 쉼표 사이의 호흡, 솔직해지고 싶을 때 '우리'로 묶는지, '너'한테 건네는지, '사람이란 게'로 한발 물러서는지예요. 다 내가 고르고 있는 줄도 모르는 선택이죠. 영어의 기능어, 그러니까 대명사·관사·전치사·조동사·접속사는 다 합쳐도 500개가 안 돼요. 한국어로 치면 조사나 어미 같은, 문장의 이음새죠. 그런데 심리학자 제임스 페니베이커가 『단어의 사생활』(2011)에서 짚었듯, 우리가 영어로 말하고 듣고 읽는 모든 말의 절반 이상을 이 500개가 차지해요. 기능어는 말하자면 물이에요. 누구나 그 물을 휘젓지만, 휘저어 생기는 물결은 놀랄 만큼 사람마다 달라요.
여기까지만 보면 술자리에서 꺼내기 좋은 신기한 얘기예요. 2013년 듀케인 대학교 한 교수의 소프트웨어가 '로버트 갤브레이스'의 정체를 J.K. 롤링으로 밝혀낸 일, 전치사 개수를 세다가 법정에 서는 전문가 증인까지 나온 일 같은 거요. 근데 알고 보니 이 지문은 혼자서 찍히는 게 아니었어요. 2011년, 몰리 아일랜드와 제임스 페니베이커가 이끈 연구팀이 4분짜리 스피드 데이트 40건의 대화록을 들여다봤어요. 짝마다 두 사람의 기능어 비율이 4분 동안 서로 얼마나 가까워졌는지를 잰 거예요. 연구팀은 이걸 언어 스타일 매칭(LSM)이라고 불렀어요. 점수가 중앙값보다 높은 짝은 두 번째 데이트를 원할 가능성이 약 3.5배 높았어요. 두 번째 연구에서는 커플 86쌍의 인스턴트 메신저 대화 기록에 같은 잣대를 대 봤어요. 그랬더니 석 달 뒤에 어느 커플이 아직 사귀고 있을지를 예측할 수 있었어요. 예측을 가른 건 커플이 무슨 말을 했느냐가 아니었어요. 무심코 쓰는 작은 단어들이 서로를 향해 기울었느냐였죠.
무엇을 세는 걸까
두 사람이 똑같이 비 오는 날 출근길을 적어요. 한 사람은 이렇게 써요. 지하철이 또 늦었다. 승강장에 서 있었다. 다들 피곤해 보였다. 다른 사람은 이렇게요. 그래서 우리 다 그냥 거기 서 있었는데, 지하철은 진짜 안 오고, 다들 좀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거든. 둘 다 정확해요. 둘 다 같은 일을 쓴 거고요. 그런데 둘 중 누구도 그렇게 쓰겠다고 고른 적은 없어요.
전문 용어로는 이걸 계량문체학(stylometry)이라고 해요. 문체를 숫자로 분석하는 거죠. 분석 단위는 '목소리'나 '어조'가 아니에요. 그런 말은 너무 흐릿해서 잴 수가 없거든요. 단위는 빈도예요. 페니베이커의 언어 분석 사전 LIWC(Linguistic Inquiry and Word Count)는 언어를 반으로 갈라요. 한쪽은 내용어. 명사, 동사, 형용사처럼 국어 선생님이 밑줄 칠 만한 단어예요. 다른 쪽은 기능어. 대명사, 관사, 전치사, 조동사, 접속사, 부정어예요. 내용어는 그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려 줘요. 기능어는 눈이 그냥 미끄러져 지나가는 예닐곱 개 범주에 불과하지만, 지금 누가 말하고 있는지를 알려 주죠.
글로만 서로를 알았던 사람들
요즘 생긴 일도 아니에요. 릴케는 1902년부터 1908년까지 열아홉 살 사관생도 프란츠 크사버 카푸스와 편지 열 통을 주고받았어요.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채로요. 그 편지는 릴케가 세상을 떠나고 3년 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됐어요. “마음속에서 아직 풀리지 않은 모든 것에 인내심을 가지세요.” 1903년 7월, 릴케가 카푸스에게 쓴 문장이에요. 끝내 얼굴 한 번 보지 못할 낯선 사람에게요.
좀 더 소박한 이야기도 있어요. 1949년 10월, 뉴욕의 가난한 프리랜서 작가 헬렌 한프가 런던 채링크로스 로드 84번지의 고서점 마크스 서점(Marks & Co)에 편지를 보냈어요. 윌리엄 해즐릿의 헌책이 있느냐고 묻는 편지였죠. 답장은 수석 구매 담당 프랭크 도엘이 썼어요. 근엄할 만큼 정중한 영국식 예의를 갖춰서요. 두 사람은 20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어요. 한프는 배급제로 버티던 런던에 햄 통조림과 나일론 스타킹을 부쳤고, 도엘은 맨해튼에선 구할 수 없던 책을 부쳐 줬어요. 1968년 12월 도엘이 복막염으로 세상을 떠나자, 아내가 한프에게 편지로 소식을 전했어요. 그때까지도 한프는 그 서점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어요. 1970년, 한프는 그 편지들을 묶어 『채링크로스 84번지』를 펴냈어요. 얼굴 한 번 안 보고 보낸 20년. 그리고 책이 된 진짜 우정.
당연히 나올 반론
당연히 이런 반론이 나오겠죠. 그거 다 투사 아니냐고요. 편지로 만나는 건 쓴 사람이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걸 마음대로 비춰 보는 스크린일 뿐이라는 거예요. 1966년 조지프 와이젠바움은 ELIZA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사용자가 한 말을 질문으로 바꿔 되돌려 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안 하는 프로그램이었어요. 그런데도 MIT 사용자들이 여기에 속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어요. 만드는 과정을 내내 옆에서 지켜본 와이젠바움의 비서마저,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며 와이젠바움더러 방에서 나가 달라고 했죠. 스크립트 하나에도 정을 붙이는 게 사람인데, 나를 비춰 줄 만큼 텅 비어 있기만 하면 뭐에든 정을 붙이지 않겠어요?
이 반론이 겨냥한 과녁은 진짜 있어요. 다만 화살이 빗나갔죠. 조지프 월서의 초개인적 모델(hyperpersonal model)은 1996년 학술지 Communication Research에 실렸고, 지금도 이 분야의 표준 참고문헌으로 꼽혀요. 이 모델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낯선 사람을 이상화한다는 걸 부정하지 않아요. 이상화를 네 가지 메커니즘 가운데 하나로 볼 뿐이에요. 쓰는 사람은 다듬어요. 읽는 사람은 이상화해요. 매체는 공들여 쓸 여유를 줘요. 두 사람은 서로가 공들인 글 쪽으로 기울고, 그게 되먹임 고리처럼 이어져요. 이 넷이 맞물려서, 시간차를 두고 글로 주고받는 대화가 조건만 맞으면 같은 길이의 대면 대화보다 더 친밀하게 느껴진다는 거예요. 모델 어디에도 그 이상화가 틀려야 한다는 조건은 없어요. 필요한 조건은 딱 하나, 글이 솔직해야 한다는 것뿐이에요.
게다가 투사만으로는 몰리 아일랜드 연구팀의 데이터가 설명되지 않아요. 읽는 사람이 쓴 사람을 혼자 그려 내는 것뿐이라면, 두 사람의 작은 단어 비율이 서로를 향해 움직일 이유가 없어요. 그 움직임으로 두 번째 데이트를, 석 달 뒤에도 커플이 함께인지를 예측할 수 있을 리는 더더욱 없고요. 하지만 비율은 움직여요. 예측도 맞아떨어지고요.
솔직히 인정할 한계
물론 이 중 어떤 것도 테이블 건너편에 마주 앉은 얼굴을 대신하진 못해요. 2004년 존 술러도 분명히 짚었어요. 익명에 시간차까지 있는 바로 그 공간이 다른 것도 함께 풀어놓는다고요. 하나는 양성 탈억제예요. 평소답지 않은 다정함, 평소답지 않은 솔직함, 낯선 사람끼리 베푸는 너그러움이죠. 다른 하나는 독성 탈억제. 괴롭힘, 잔인함, 경멸이에요. 둘 다 같은 흙에서 자라요. 어느 쪽이 나오느냐는 매체 자체보다, 그 매체가 무엇에 보상을 주도록 만들어졌느냐에 더 달려 있어요. 분노를 먹고 크도록 만든 댓글창엔 분노가 쌓여요. 편지를 위해 만든 우편함엔, 대개는 편지가 도착하고요.
우편함이 있는 이유
400단어짜리 편지 두 통은 카톡 200개보다 쓰는 데 오래 걸려요. 답장을 보내도 상대가 벌써 읽었는지는 따로 알려 주지 않아요. 프사가 낯선 사람에게 보여 주는 건, 빛이 마음에 들었던 어느 화요일의 내 얼굴이에요. 편지가 보여 주는 건 그거랑 달라요. 상대 이름은 한참 동안 몰라요. 끝까지 모를 때도 있고요.
그렇게 지은 방이 있을 자리는 아직 남아 있어요. 종이 한 장, 우표 한 장, 다시 종이 한 장. 꼬박꼬박 업데이트해야 할 프로필도 없어요. 답장 옆에서 '1'이 사라지나 지켜볼 일도 없고요. 그저 낯선 사람에게 일부러 쓰는 편지 한 통. 그리고 반대편 끝에는 한 사람이 있어요. 충분히 오래 주고받다 보면, 그 사람이 쓰는 '은/는'과 '그냥', 작은 머뭇거림에도 그 사람만의 모양이 잡혀요.
그러니까 글에 비치는 사람과 겉모습에 비치는 사람은, 알고 보니 같은 사람이 아니에요. 편지는 쓰는 사람을 지우지 않아요. 평소 그 사람 앞을 가리고 서 있던 것 일부를 걷어 낼 뿐이죠. 그걸 익명이라 불러도 좋아요. 하지만 실은 그 반대에 더 가까워요. 분장을 지운, 그 사람 자신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