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사람에게 보내는 첫 편지는 살면서 쓰게 될 편지 중에 제일 어려워요. 그런데 다들 쓰는 건 거의 똑같아요. 안녕하세요! 저는 부산 사는 29살이에요. 등산이랑 독서를 좋아하고, 서로 사는 얘기 나눌 펜팔을 찾고 있어요. 자기소개 부탁해요!
다정하죠. 예의도 바르고요. 근데 답장할 말이 없어요. 상대가 받아서 이어 갈 만한 얘기가 하나도 없거든요. 답장이 와도 도시 이름만 바뀐 똑같은 편지일 거예요. 그렇게 편지 대화는 두 번째 편지에서 끝나요. 아주 예의 바르게, 왜 끝났는지 둘 다 모르는 채로.
다르게 쓰는 법이 있어요.
작은 일 딱 하나만
이번 주에 실제로 있었던 작은 일 하나를 써요. 인생 말고, 이번 주요. 전기포트가 딸깍 꺼졌는데 아무도 오지 않았던 일. 집 앞 빵집이 다시 아침 6시에 문을 열기 시작한 일. 2021년에 답장했어야 했던 이메일.
이게 왜 통하는지는 입 밖에 내기 민망할 만큼 단순해요. 진짜 있었던 작은 일은 구체적이고, 구체적인 얘기에는 답할 수가 있거든요. 취미는 그게 안 돼요. "독서 좋아해요"를 받으면 상대는 할 말이 없어요. "새벽 2시에 책을 다 읽고는 결말에 화가 나서 한참 누워 있었어요"를 받으면, 답장 한 통이 통째로 나오죠.
그래야 매물 소개글 말고 사람 냄새가 나기도 하고요. 관심사 목록 보고 반해서 편지를 이어 간 사람은 지금껏 아무도 없어요.
편지 구성 (네 부분, 다 짧게)
1. 바로 본론부터 시작해요. 낯선 분께. 이 편지를 받으실 즈음 잘 지내고 계시길 바라요. 같은 인사는 빼요. 곧장 그 일로 들어가요. 전기포트가 딸깍 꺼졌는데, 아무도 안 왔어요. 읽는 사람은 벌써 내 부엌에 와 있어요.
2. 무슨 의미인지 말고, 어땠는지를 써요. 두세 문장이면 돼요. 창문, 빛, 소리. 이 얘기를 왜 하는지 설명하고 싶어도 꾹 참아요. 작은 일을 제대로 골랐다면, 이유는 말 안 해도 보이거든요.
3. 살짝 비틀어요. 처음 보는 사람이 기대하는 것보다 반 발짝 더 들어가는 문장 하나. 빈 부엌이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그게 좀 걱정이에요. 답장을 부르는 게 바로 이 문장이에요. 극적이라서가 아니라, 솔직하고 짧고, 굳이 안 해도 될 말이라서요.
4. 상대가 자기 얘기를 해야만 답할 수 있는 질문으로 끝내요. 그쪽 아침엔 무슨 냄새가 나요? 질문은 딱 하나. 다른 말을 다 쓴 다음, 맨 아래에 따로 한 줄로. 이게 바로 끝에 열어 두는 문이에요.
이게 편지 한 통의 전부예요. 문장으로 치면 5~10개. 쓰는 시간보다 고민하는 시간이 더 길어야 맞아요.
첫 편지, 얼마나 길게 써야 할까?
생각보다 짧게, 카톡보다는 길게요. Kindredly에서 수신인 없는 편지는 제대로 된 한 줄만 있으면 보낼 수 있어요. 최소 20자, 몇 단어면 되죠. 잘 쓴 첫 편지는 보통 60~200단어 사이고요. 편지라고 부를 만큼은 길게, 답장이 숙제처럼 느껴지지 않을 만큼은 짧게요.
종이에 쓴다면 편지지 한 장, 앞면까지만. 뒷면까지 채우고 있다면, 그건 상대에게 쓰는 게 아니라 내 얘기를 늘어놓는 거예요.
답장이 오는 첫 문장 12개
하나 골라 가져다 써요. 디테일만 내 걸로 바꿔서요. 결국 편지는 디테일이 전부거든요.
- 전기포트가 딸깍 꺼졌는데, 아무도 안 왔어요.
- 오늘 흔들리던 의자를 고쳤어요. 3월부터 고쳐야지, 고쳐야지 하던 거요.
- 자꾸 카톡을 보낼 뻔하는 사람이 있어요.
- 키우던 화분이 죽었는데, 정작 울었던 건 전혀 다른 일 때문이었어요.
- 오늘 회사에서 진짜로 웃었어요. 웃어야지, 하고 마음먹지 않아도 된 게 오랜만이에요.
- 올해만 벌써 세 번째 도시예요. 이제 전기포트가 어느 상자에 들었는지는 귀신같이 알아요.
- 오늘 아침엔 차를 딱 한 잔만 끓였는데, 하나도 처량하지 않았어요.
- 그 사람은 모르는, 그 사람만을 위한 플레이리스트가 있어요.
- 괜찮아지는 게 이렇게 지루한 일인 줄, 아무도 미리 말해 주지 않았어요.
- 올해부터 싫다고 말하기 시작했어요. 알고 보니 제가 떠안고 있던 것들, 대부분 빼도 안 무너지는 거였더라고요.
- 저는 자정이 넘어야, 글로만, 그리고 제 얼굴을 모르는 사람한테만 솔직해져요.
- 2021년에 그 이메일에 답장했더라면, 저는 지금쯤 다른 곳에 있을까요?
눈치챘어요? 열두 개 중에 무슨 일 하는 사람인지 밝힌 문장은 하나도 없어요.
빼야 할 다섯 가지
- 첫 줄에 나이랑 사는 곳. 셀프 호구조사는 건너뛰어요. 상대가 알아 가게 두고요. 괜찮은 플랫폼에선 어차피 물어볼 수도 없어요.
- "자기소개 부탁해요." 이건 질문이 아니라, 자소서 써 오라는 소리예요.
- 사진, 또는 사진 달라는 말. 찾는 건 답장해 줄 사람이에요. 그건 얼굴로는 하나도 알 수 없어요.
- 서툴러서 미안하다는 말. 영어가 서툴러서 죄송해요. 아무도 신경 안 써요. 괜히 제일 좋은 한 줄이 들어갈 자리만 잡아먹어요.
- 질문 두 개 이상. 상대는 제일 쉬운 하나에만 답하고, 나머지 질문엔 내내 미안해할 거예요.
그다음엔
잘 풀리면 상대가 질문에 답해 올 거고, 그 답 안에 두 번째 편지가 들어 있을 거예요. 두 번째도 똑같이 써요. 상대 편지에서 눈에 들어온 작은 것 하나, 이번 주 내 작은 일 하나, 질문 하나. 계속 그렇게요. 편지가 다섯 번쯤 오갈 무렵이면, 매일 얼굴 보는 몇몇 사람보다 이 사람을 더 잘 알게 됐다는 걸 깨달을 거예요. 그럼 이제 그걸 어떻게 할지 정해야겠죠. (그 순간에 꺼낼 질문도 있어요.)
쓰기 전에 남의 첫 편지부터 몇 통 구경하고 싶다면, 오늘 책상에 열다섯 통이 올라와 있어요. 이름은 하나도 안 적혀 있어요. 어느 걸 집어 들든, 내 앞으로 온 편지예요.